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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에 대한 감동적인 글....
by edwina  2004-03-31 12:03 공감(0) 반대(0)
회사 게시판에 누군가가 다음 카페에서 글을 퍼왔다며 다음의 글을 올려놓았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생각중입니다.

길지만 시간 내어서 한번 읽어보시면 정말 감동적일거예요...
그리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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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3월에 결혼했으니 6년차입니다. 34살의 남편, 32살의 아내. 맞벌이. 서울. 그리고 5살의 꼬마 3가족이고 내년에 둘째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셋째도 생각이 있습니다. 여기 까페에서 말하는 경제적 자유는 아직 멀었지만 하나, 둘 실현 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야간 당직 근무가 있습니다. 조금은 여유로운 시간이기에 내가 살아온 이야기와 결혼에 대한 가치관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자는 생각에 인터넷 항해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참고로 글은 시리즈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1주일에 하나씩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갑니다 ~~~~~~~~



1. 내가 바라는 아내란?

아내와 결혼하기전 나에게는 5년 넘게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당시 사랑이었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지금 곰곰 되씹어 보면 "습관에 의한 익숙함" 이었습니다. 태어나는 걸 제외하면 인간사 모든 것이 선택의 연속이기 때문에 지금의 아내와 살고 있지만 그 사람과의 "특별한 일"이 없었다면 지금 난 아내가 아닌 그 사람과 살고 있을 겁니다. 그 "특별한 일" 때문에 결혼은 익숙함에서 오는 습관으로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현실을 바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대 후반의 한 남자에게 감당하기 힘든 가슴앓이 이후 난 그 사람과 헤어짐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이별에 대한 준비를 했습니다. 내가 결혼할 여인에 대한 기준을 하나하나 생각할 수 있게 만든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90년대 초반부터 듀오를 대표주자로 선우, 피어리, 닥스 등 다양한 결혼정보업체가 나온 큰 원인은 결혼시장의 대중화일 겁니다. 이전에도 士자 들어간 직업군과 경제적 여유를 가진 집안을 이어주는 마담뚜와 비공식적이지만 주변 친지들이 연결시켜 주는 선이라는 소규모의 결혼시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영세시장의 대중화가 결혼정보업체의 등장입니다.



미혼인 사람에게 결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 사랑, 순결, 영혼" 이런류의 달콤하고 추상적인 단어를 떠올릴 겁니다. 반대의 질문을 기혼인 사람에게 하면 "돈, 육아, 고부갈등, 시댁, 처가" 이런류의 현실적은 단어를 떠올립니다.



결혼시장에 나온 상품에게서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직업, 학벌, 집안, 외모"입니다. 그보다 살아가는데 더 중요한 "성격, 가치관, 마음"은 앞의 가치에 묻혀 버립니다. 시장에서 물건 고르듯이 반복적으로 계속 사람을 만나다 보면 더욱 더 "직업, 학벌, 집안, 외모"에 얽메이게 됩니다. 그래서 결혼하면 그 사람들이 떠올리는 "행복, 사랑, 순결, 영혼"으로 이어질까요. 글쎄요. 하루에 3쌍이 결혼하고 1쌍이 이혼한다는 통계자료가 답이 될것입니다.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을 시장에서 물건 고르듯이 골라야 하는 현실이 개인적으로는 서글픔니다.



한번의 가슴앓이 후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혼 후 내가 바라는 아내상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받아 들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현실적이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람이었으면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남에게 보여주는 허례허식보다는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많은 여행덕분인지, 아님 졸업한 대학의 학풍 때문인지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일에 대해 다양성을 인정합니다. 아내도 그러했으면 하고 바랬습니다. 남에게 보여주는 겉치레 문화에 익숙하고, 나만의 세계에 갖힌체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없는 보수적 성격이라면 살아가면서 다툼이 있을거고 난 그 다툼에 지쳐가거나 아님 타협할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다행이 아내는 나보다 더 현실적입니다. 주변 환경이나 여건에 관계없이 본인의 향기를 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 자기 생각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결혼후 많은 여자들이 남편의 그늘에 묻혀버립니다. 반대로 남편은 아내의 묻혀짐으로 인한 책임감에서 오는 가부장적 권위주의로 갑니다. 이 땅의 아내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자신과 묻혀진 현실사이에는 지체현상이 일어납니다. 이상보다는 현실이 우선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란 이름으로 참고 살아갑니다. 나의 아내는 그러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주관이 뚜렷하고 꿈이 있으며 가족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아니길 바랬습니다. 결혼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종속되는 것이 아닌 평등한 두 사람이 만나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 함께 할 취미가 있었으면

함께 할 취미가 있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대화를 여는 하나의 창구가 됩니다. 다행히 아내와 나는 함께 하는 여러 취미가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테니스입니다. 직장, 가정사에 쌓인 스트레스를 주말 코트에서 흘리는 땀으로 날려 버리곤 합니다. 최근에는 달리기를 하는데 제가 월,월,수,금 아침, 아내는 화,목,토 아침에 합니다. 언젠가 부부동반 마라톤 풀코스 완주가 목표입니다.



한편, 둘다 싫어하는 대표적인 것이 쇼핑입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쇼핑을 좋아한다지만 이상하게도 아내는 쇼핑을 싫어합니다. 나는 아내의 두배정도 싫어하는 편이고... 그래서 웬만한 쇼핑은 인터넷. 꼭 해야될 경우에는 주말에 몰아서 합니다.



다른 요인들은 거의 보지 않았습니다. 위의 3가지에 만족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했기에 98년 봄에 결혼 했습니다. 아직 진행형이지만... 지금까지는 행복합니다. To be continue...













결혼 6년 보고서.. 2. 결혼은 현실. 돈! 돈! 돈!



살아가면서 사람들의 영원한 딜레마는 돈입니다. 어느 누가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부모를 잘 만났거나, 아님 특별한 능력을 가진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신혼부부는 가난합니다. 그래서 성공시대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말이 "신혼 시절 단칸셋방"입니다. 우리 부부도 당연히 그 특별한 몇몇이 아닌 보통 사람이니 가난한 신혼이었고, 지금도 그리 넉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지금까지 키워주고 공부시켜준데 대해서 감사 드리고 더 이상 기대고 싶지 않다는 아내와 나의 편집증적 강박관념이 있습니다.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돈 문제를 하나하나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결혼 비용 중 가장 큰 부분이 살집이고, 다음이 혼수이고 그 다음이 신혼여행을 비롯한 결혼식 당일 비용입니다. 이 부분에서 신혼부부들은 많은 갈등을 경험합니다. 왜냐면 살집은 신랑이, 혼수는 신부라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는 관계로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은 많고 나아가 자존심으로까지 연결되는 미묘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원천적으로 차단했습니다. 결혼은 집안이 중심이 되어 부모님이 준비하는 것이 아닌 모든것을 아내와 내가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한다면 꼭 하는 나의 성격을 부모님이 경험으로 잘 알고 계셨고 차남이어서 가능했던거 같습니다. 당시에 부모님이(특히 장인 장모님) 서운해 하셨지만... 지금은 대견해 합니다.



「①빚내지 말자 ②다른 사람 의식하지 말고 분수에 맞게 ③가급적 재미있게」라는 세가지 기준을 정했습니다. 집은 당산동에의 다가구 주택을 5000 전세로 계약했습니다. 장모님이 아파트에 미련을 가지고 계셨지만 빚내지 않고 분수에 맞게라는 원칙에 충실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혼수는 돈으로 받았습니다. 덕분에 불필요하거나 과도한 혼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남는 돈은 결국 우리 돈이 되니깐요.



그래서 우리는 경실련에서 최소의 비용으로 양재시민의 숲에서 전통 궁중혼례로 하기로 했습니다. 모든 예식 비용이 80만원.(당시 IMF의 영향) 그리고 식사는 뷔페로 준비했습니다. 청첩장은 3단에 비해 비용이 30% 절약되는 2단 그것도 협찬 받았습니다. 물론 전통궁중혼례로 한 또 다른 이유는 공장에서 물건 찍어 내듯이 하는 기존 결혼에 대한 거부감이 컸습니다. 결혼식에 오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추억과 구경거리를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쌀쌀한 날씨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왔고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그 당시 결혼 이야기를 합니다. 아침방송에서 취재도 왔던 기억이 납니다. 결혼식 장면과 인터뷰가 방송에 나갔는데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니 "연락하지 않아서 섭섭하다"는 친구들의 전화와 메일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 당시 메모를 보니 비용대비 축의금이 한참 많이 들어와서 결혼식은 흑자였습니다. 당연히 부모님이 흑자 금액을 가져갔고 지금까지 잘 키워준것에 대한 선물이라 생각했습니다. 양가 부모들이 대구/광주에서 올라왔는데 버스타고 오셨다 버스타고 가셨습니다. 각 업체로부터 결제는 모두 제 몫이었지요.



쉬어가는 코너

질문 : 신혼여행지에서 신혼부부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답 : (축의금으로 받은) 돈세기 ㅋㅋ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습니다. 화장실 슬리퍼, 못, 고무장갑 등 사소한 살것들이 1달동안은 엄청 많습니다. 그것도 주말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고행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피해갈 수 없는 집들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용 절약면에서 집들이의 제 1원칙은 금/토/일 연속으로 하는 겁니다. 물론 몸은 힘듭니다. 대신 돈이 생각 이상으로 절약됩니다. 우리의 경우 금저녁, 토저녁, 일점심 이렇게 2주했습니다. 새벽 2, 3시까지 설거지 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가정경제와 생활에 대한 생각은 ‘석달은 적응기이다’였습니다. 결혼후 3달동안은 정신적, 경제적으로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 서로에 대한 테스트 시간입니다.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과욕은 금물입니다. 화낼 이유도 짜증낼 이유도 없습니다. 어차피 맞춰 나가는 시행착오의 기간입니다. 한 템포만 늦게 반응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모든일이 잘 풀립니다.



3달후 진지하게 가정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틈틈히 했습니다. 그리고 일요일 날 잡아서 서로의 소비습관, 급여내역, 연중 꼭 써야 할 돈 등을 이야기 했고 각자 관리보다는 잘하는 사람이 돈관리를 하기로 하고 먼저 3달을 제가 하기로 했는데 아직까지 하고 있으니 아내 생각엔 내가 잘하고 있는가 봅니다.



99년 7월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광주에서 장모님이 키워주기로 했는데 육아비(50만/월), 오르내리는 차비(15만원/월)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부분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이의 웃음, 아이의 눈망울이 주는 행복이 어찌 그 돈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30개월을 첫아이는 할머니 밑에서 자랐고 지금은 회사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습니다.



돈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소비를 합니다. 무작정 아끼지도 낭비하지도 않습니다. 추억할 거리를 만들기 위해 가급적이면 월 1회 여행을 기획합니다. 어릴적 5일마다 서는 장날 중국집에서 아버지가 사주신 짜장면 한그릇을 아버지의 투박한 정과 함께 기억하듯이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추억할 무엇인가를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육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가제 : 성공한 영웅보다는 좋은 아빠로 남고 싶어..)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결혼 6년 보고서.. 3. 추억할 거리가 많은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그럭저럭 맞벌이를 하면서 미래의 경제적 자유를 하나 둘 실현시켜나가던 2001년 3월 어느날. 아내가 "회사 그만두고 영어 공부하러 가면 안될까"면서 지나가는 말로 잠자리에서 이야기 하더군요. "알아서 해" 하며 잠들었습니다. 나는 침대에 누우면 30초 이내로 잠들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잠결에 들은 아내의 "영어연수"에 대해 곰곰 생각했습니다. 아내는 공대를 나왔고 시스템 엔지니어로 나름의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 삐걱삐걱 돌아가는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아내의 나이 29. 엔지니어의 길을 걷고 싶은 아내는 나이에 비해 빠르게 진급하여 현장과 멀어져 있었습니다.



3일을 아내와 나의 인생대차대조표를 머리속에 그리며 곰곰 생각했습니다. 먼저 연수불가 관점에서 보면 1)미래에 대한 불확실입니다. 연수후 아이가 있는 결혼한 여자가 취업할 수 있는 자리가 많지 않는 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다음으로 2)경제적 문제. 연간 3,000만원 내외로 발생하는 연수비용은 가진것 없이 하나하나 이루어 나가는 우리에게는 큰 부담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아내가 1년동안의 수입이 고스란히 없어지기 때문에 기회 비용면에서 보면 훨씬 큰 액수이지요.



3)가족간의 이별. 아이가 당시 3살이었습니다. 전화로 「엄마 어딨어?」하면 「서울」, 「엄마 어디갔어?」하면 「회사」라고 답하는 녀석입니다. 이런 녀석을 두고 연수를 생각하는 아내의 마음이야 말하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4)사회적 편견. 장모님께 아내의 연수 이야기를 말씀드리니 「갈려면 자네가 가야지 왜 애 엄마가」하더군요. 당신의 딸인데도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경우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지는 생각은 「이해불가」일 겁니다.



다음은 연수가능이라는 면에서 생각해보았습니다. 1)No risk no gain. 무엇인가를 얻고자 한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가지고 있는 기득권이 편안하고 달콤할수록 이러한 결정은 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협하지요. 지금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자. 이는 곧 아무것도 얻지 못한 현실과의 타협을 의미합니다. 이런면에서 다른 사람들이 무모하다 할지라도 아내의 결정은 존중할 만합니다. 우리는 당시 나는 30대 초반 아내는 20대 후반이었습니다. 지금 실패한다고 해도 기회는 다시 찾아올 나이었지요.



2)기회의 다양성. 어느기업가가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라고 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지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보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그 세상이 주는 기회의 다양성 또한 존재합니다. 아내의 연수는 그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3)영어로 인한 계층의 고착화. 아내가 연수를 가고 싶어하는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IT업계에서 영어는 더 이상 외국어가 아닙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기술변화. 세미나 등은 모두 영어로 진행됩니다. 영어가 외국어라기 보다는 생존의 수단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근대이후 외국어에 의한 계층 고착화는 조선말에는 중국어가, 근세초기에는 일본어가, 해방후에는 영어가 주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역사가 반복되듯이 21세기 초에 또다시 영어로 인한 계층고착화가 일어나고 있었고 현재도 진행중입니다.



경제적으로 따지면 아내는 연수를 가지 않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는게 돈이 다는 아니지요. 사람의 삶(역사)이란게 토인비가 말했듯 「도전에 대한 응전」이라는 개념으로 볼 때 「영어」라는 도전에 아내는 「연수」라는 쉽지 않는 응전을 내렸을 뿐입니다. 아내를 사랑하기에 아내의 꿈과 이상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두달 후 아내의 비행기 표를 예약했습니다.



1년여 떨어져 살면서 전화요금 엄청 나왔습니다. 그리고 주고 받은 메일은 책을 두세권 낼 수 있을 겁니다. 그 애절함, 사무친 그리움에 지금 이순간도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몇가지 영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91년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논산 훈련소에서 뒤돌아서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눈물은 살면서 항상 큰 그림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2001년 10월. 휴가때 빗방울 흩날리는 더블린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를 보자마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아내의 모습, 서울로 떠나기 마지막날 별로 길지 않는 나의 손톱과 발톱을 고이고이 깍아주던 아내의 애닯은 눈망울을 죽는날까지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지금은 아내에게 못마땅하거나 서운할 때 그 영상을 생각하면 가슴이 싸하면서 서운함은 없어지고 사랑이 자리합니다. 그만큼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은 넓어졌지요. 요즘은 한가할 때 그때 쓴 메일 보면서 미소짓습니다. 추억할 거리가 많은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아내는 5개월의 공백 후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영어! 아주 잘합니다. 그렇다고 네이티브 정도는 아니고... 나도 영어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1년 동안의 연수로 지금의 위치에 선 아내가 자랑스럽고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아내의 연수로 인해 아파트도 못사고 너무 올라 버린 집값 때문에 마음 아픕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자유는 일정기간 유보되었고 떨어져 산 시간들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가족의 소중함과 아내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영어가 따라왔습니다.









결혼 6년 보고서.. 4. 성공한 영웅보다는 좋은 아빠로 남고 싶어



날씨가 좋아졌다고 하더니 오늘은 또 추워졌네요. 꽃샘 추위랍니다. 결혼 6년차입니다. 다음주 월요일이 결혼기념일이니 딱! 6년이군요. 오래 살지 않았습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많지요. 틈나는 데로 연재하고 있는(그런데 오랜만이군요) 결혼 6년의 보고서 그 네번째 이야기 "성공한 영웅보다는 좋은 아빠로 남고 싶어"(교육) 갑니다.



참고로 지난 이야기는...

1. 내가 바라는 아내란 (선택)

2. 결혼은 현실. 돈! 돈! 돈! (경제)

3. 추억할 거리가 많은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가치관)



○ 지식보다는 인생을...

주변에 쉽게 접할 수 있는 조기교육 열풍. 말하기 시작하자마자 관심 갖는 아이 영어교육 그리고 며칠전 저녁뉴스에서 ''''2월 출생신고 줄어''''라는 보도를 봤습니다. 이유는 2월 출생한 아이는 조기 입학하기 때문에 학교 적응에 문제가 있어서라고 합니다. ‘사람들 참으로 영리하다 그리고 정말 아이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다 할려고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아이를 위해서인지 부모의 대리만족을 위해 아이에게 올인하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제가 자라온 이야기를 할려고 합니다. 첫아이가 6살이고 둘째가 5월 초 예정입니다. 아이를 키워보는 입장에서 부모님(특히 아버지)의 어릴적 가르침이 새삼 존경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작은 일에 의미와 행복을 느낄 수 있고 내 이야기 보다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습니다. 나의 아버님이 그랬듯이 아들넘에게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교육의 가장 큰 특징은 ''''독립심''''과 ''''믿음''''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모든 결정은 스스로하게 만들었고, 그리고 갑갑하셨겠지만 시간을 두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지금 내가 아이를 키워보니 아버님의 인내력이 새삼 놀랍습니다. 모든일을 아이 스스로하게 하고 아버지는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셨습니다. 지나고 보니 아버지는 지식보다는 인생을 자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순간순간 화도 나고 갑갑도 하셨겠지만 자식들의 능력을 믿으셨습니다.



○ 정답 피해피해 반에서 49등

중학교 2학년. 나름대로 공부 잘했습니다. 아버님, 절대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잘하는 것에 대해 꽤 인색하셨습니다. 그때 부러웠던 친구가 있었는데 시험 잘 봐서 아버지가 자전거 사준 넘이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상처 받았습니다. 공부를 해도 내가 더 잘하는데... 왜 우리 아버님은 칭찬 한마디 안하실까. 그 나이엔 반항 많이 합니다. 작은 일에도 그냥 반항하고 싶은 나이입니다. 다음달 시험에 ''''정답''''을 피해피해 답안을 작성해서 반에서 49등 했습니다. 그때는 그냥 그러고 싶었습니다. 성적표 받는 날 담임 선생님께 야단 많이 많고 다음주에 부모님 모시고 오라는 소리 들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자랑스럽게(?) 아버지께 성적표 보여 드렸습니다. 한참 말이 없으시더니 ''''성적표 잘 봤다''''하시곤 아무 말씀 없으셔서 그냥 나왔습니다. 다음날 저녁 먹을 때 ''''공부는 부모를 위해 하는게 아니다'''' 딱 한말씀 하셨습니다. 그 다음 야단치는 말씀을 기다렸지만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대화에서 ‘여백의 미’ 중요합니다. 아버지님은 당신의 결론이 아닌 스스로 깨달을 방법을 제시하시고 시간을 두고 기다리셨습니다. 미주알 고주알 부연설명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어린 마음에 든 생각은 ‘공부는 나를 위해서 하는 거구나’였습니다. 칭찬 받는거 포기했습니다. 내일 내 스스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 하루가 아버님에게는 무척이나 긴 시간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식 키워보니 알겠습니다.



○ 미치도록 하기 싫었던 야간자율학습..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 요즘도 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에 야자(야간자율학습)라는게 있었습니다. 5월. 꽃피고 새우는 시절이지만 대학 진학을 위해서도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런데 당시 정말이지 미칠 정도로 야자 하기 싫었습니다. 내가 왜 이 시간에 여기에 있어야 하나 이런 존재론적 의문까지 들었습니다.



먼저 담임 선생님께 야자 빼달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몇대 맞았습니다. 며칠은 그냥 지나갔는데 정말 미치도록 하기 싫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말씀 드렸습니다. 다음날 아버지 학교 담임 선생님 찾아오셔서 저를 야자에서 제외 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예외가 없다’와 ‘아들 대학 안 보낼려고 하느냐’는 논리로 아버지를 설득 하셨지만 ''''내 자식이 하기 싫다''''는 논리로 저 결국 야자에게 빠졌습니다.



자유를 얻었습니다. 공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시내가서 영화도 보고 롤라 스케이트장도 다녔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는 아버지의 믿음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습니다. 한달이 지난 6월 초. 다시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결정적인 것이 같이 놀고, 공부 할 친구가 없었습니다. 공부도 노는것도 친구들이 있는 학교에서 하고 싶었습니다. 들어가기는 야자에서 빠지는거 보단 쉽더군요. 학생의 특권입니다.



아버님은 나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던거 같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나 집에서 공부하나 결과는 다를 바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부에 대한 마음 가짐이다’는 생각을 하신 듯 합니다. 자식 키워보니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겠습니다. 아이의 눈 높이와는 상관없는 부모의 욕심으로 이것도 시켜 보고 싶고 저것도 가르쳐 보고 싶고... 이런 일들을 주변에서 많이 보고 저 스스로도 그런 충동을 종종 느낍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인내력이 존경스럽습니다.



○ 아버지와 처음 간 룸살롱

대학 들어갔습니다. 입학식 마치고 내려 가시기 전에 ''''이제 너도 어른이 되었으니 술한잔 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간 곳은 신촌에 있는 ''''룸살롱''''. 처음 가봤습니다. 시바스리갈을 마신듯 합니다. 아가씨가 둘 나왔는데 그 사람들 우리 둘의 관계를 무척 신기하게 바라보더군요. 나중에 부자 관계임을 알고 엄청 놀라워 했고 아버지와 저는 즐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저에게 가르쳐 준 것은 술집에서의 문화와 사람에 대한 예의였습니다.



○ 자신에게 당당함, 학생 때는 소중한 인생 경험, 사회에서는 돈

이렇게 자란 저. 군대 갔다와서 완전히 집에서 독립했습니다. ''''왜 내가 이 나이(25살)까지 부모님께 돈 타 써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께는 ''''앞으로는 스스로 살겠습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2년 동안 등록금, 생활비 스스로 해결했습니다. 아르바이트 많이 했습니다. 과외, 커피자판기, 기숙사 식권받기, 화원에 물주기. 동선을 최소화 하기 위해 교내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이런 생각 든거 아닙니다. 어릴적부터 ''''독립심''''에 대한 아버지의 세뇌 교육 결과입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갔습니다. 장학금이 너무나 절실했습니다. 학점을 잘 받아야하기 때문에 공부도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체력이 남아 도는 나이여서 인지 그때는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2년 동안의 경험. 지나고 보니 너무 소중한 기억입니다. 시간 관리를 배웠고 일하면서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 사이에서 커뮤니케이션을 배웠습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 책에 나오는 말이 아닌 몸소 경험 했지요.



내가 하나 양보하고, 내가 한번 배려하면 그 이상 돌아온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습니다. 공부 때문에.. 아님 이건 내가 할일이 아니라서.. 이런 생각으로 젊은 시절 많은 일을 경험 하지 않으면 세상의 다양성을 보기 힘들게 됩니다. 내안의 세계에 갇히게 되지요. 결과적으로 나와 다름을 인정할 수 없고 작은 일에도 쉽게 흥분합니다. 공부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고 의미와 목적의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의 당당함으로 살 수 있다면 학생때는 삶의 소중한 경험이, 사회에서는 돈이 모입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 보다는 스스로에게 당당함이 중요하다는 것도 그때 배웠습니요. 4학년 1학기. 교양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자네도 학생이었나'''' 그러셨습니다. 교수님이 출근하시는 시간과 제가 목장갑 끼고 오토바이에 설탕, 컵, 커피 박스 싣고 자판기 관리하던 시간이 비슷해서 매일 아침 저를 봤다고 하더군요. 사실 시험을 그렇게 잘 보지 않아 A학점은 기대 하지 않았는데... A를 주셨더구요. 나중에 우연히 만났는데 ‘왜 학점 잘 주셨습니까’ 질문하니 ''''자네 사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자식하게 올인하는 부모들

여기 게시판을 보면 부모님 용돈 문제로 고민하는 글을 가끔 봅니다. 저에게는 그런 고민은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부모님 삶은 부모님 삶이고 내 삶은 내 삶이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서로 독립된 인격체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서로에게 의지하는 경우 없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올인하지 않으셨습니다. 할 수 있을 만큼만 하시고 당신들 삶도 챙기셨습니다.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릴때부터 스스로의 독립심에 대해 가르치고 깨닫게 했습니다.



부모님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았고 지금도 약간의 여유가 있습니다. 대학교 2학년 이후 독립한 자식. 결혼할 때도 지방에서 관광버스 타고 오셔서 혼주 자리만 지키셨습니다. 잡다한 결혼준비, 당일 행사의 모든 스케쥴 관리 모두 아내와 저의 몫이었습니다. 결혼 하면서 비용 보태준거 없습니다. 참, 하나 있습니다. 아내 예물 해 주셨습니다. 기대하지도 않았고 지금도 서운한 마음 없습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인생. 건조합니다. 하나하나 이루어 나가는, 그게 스스로의 힘이라면 삶이 얼마나 다이나믹하겠습니까.



○ 성공한 영웅보다는 좋은 아빠로 남고 싶어

지금 아버지는 저에게 인생의 상담자이자 동반자입니다. 자식 키워보면서 당신이 고민했던 일, 말하지 못하고 가슴 아파했던, 그리고 자식을 믿을 수 밖에 없었던 일들이 영화필름처럼 지나갑니다. 뒤돌아 봅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성공한 영웅이 보다는 좋은 아버지’였습니다. 지금의 저. 욕심부리지 않고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면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立身揚名으로 사회적 성공을 거두는 일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행복한 삶이 기초가 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기초에 대한 삶의 교육을 무시하고 아이에게 인생이 아닌 지식을 가르치려고 하시면 그 작은 지식마저도 가르칠 수 없는 愚를 범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아이를 사랑한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이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아이를 사랑한다면 지름길 보다는 돌아 돌아 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부모의 품을 떠나는 나이는 빠르면 20살, 늦어도 30살. 그 이후 아이에게는 2~3배의 인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인생에서 겪어야 하는 일들에 대해 생각하신다면 부모의 부속물이 아닌 독립적 인격체로 인정해야 합니다. 부모는 그렇게 오래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아이들에게 미주알 고주알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식에게 올인하신 분들의 그 미주알 고주알 때문에 생긴 갈등의 한 예가 지금 여기 게시판에서 볼 수 있는 고부간의 문제입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는 부모의 논리와 ''''내 인생은 나의 것'''' 이라는 자식의 논리가 충돌하고 있습니다. 한 세대가 지난 다음 세대에서는 그러지 않았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세월이 흘러 저도 『아이들에게 성공한 영웅보다는 좋은 아빠』로 기억 되었으면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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