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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 대한 분석 즉 언어 철학에 대해서
by 김도형 (대한민국/남)  2002-05-23 09:46 공감(0) 반대(0)
나는 우선 언어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프레게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하려 한다. 프레게가 언어 철학에 있어 공헌을 한 것은 일단 문장의 의미파악을 통한 진리 접근에 있어 심리주의를 극복한 것이다. 이제 문장에서의 의미는 더 이상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잘 짜여진 것이 된다. 또한 동일성을 표현하는 문장에서 지시와 지시체에 관한 구분으로 비트겐슈타인의 명제와 사실들의 개념 형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프레게의 논리적인 언어 철학적 방법을 시점으로 철학에서의 언어는 이제 전통적인 지칭설(예컨대 전통적인 지칭설에서는 ''좋은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서 ''좋음''이라는 것에 대한 존재 여부를 묻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때문에 이는 논리 언어적인 면에서 벗어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 연결된다. 즉 좋음의 개념이 지칭하는 것의 본질에 대해 고찰하게 된다.) 에서 벗어나 화용론, 의미론, 구문론 등의 구분을 분명하게 한다. 언어 철학은 프레게로부터 태동되어 카르납을 위시한 논리 실증주의자들과 후기 비트겐슈타인과 무어로 대변되는 화용론적 일상 언어 학파 등의 토대가 되었다.

프레게는 언어의 의미는 한 문장의 전체적인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그가 행한 작업은 문장의 분석이었다. 그는 문장 전체의 참과 거짓을 밝히는데 수학에서의 함수적인 방법을 적용한다. 따라서 문장을 이루고 있는 언어에 대한 분석은 상당히 논리적인 방법으로 설명된다. 그의 언어 분석의 기초가 된 수학적 함수의 방법을 먼저 살펴보자.
그는 일단 과거로부터 내려져 오던 전통적인 변수의 개념을 거부한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10 * x^2 + x 라는 형식 대신에 10 * ( )^2 + ( ) 라는 형식을 채택한다. ( ) 는 변항을 지시하기 때문에 변항-위치라 부른다. 그는 ( )라는 변항-위치에 들어갈 숫자를 하나의 기호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숫자 7과 3+4 그리고 VII 이라는 기호는 모두 다른 기호지만 동일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항-위치에 들어갈 다양한 숫자들을 변항-표시라고 한다. 그리고 변항에 들어간 그 숫자로 나온 전체의 값을 수치값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이러한 수치값이 나오기 위해서는 변항-위치에 들어간 변항-표시인 숫자와 함수자체 (즉, 10 * ( )^2 + ( ) )의 결합이 있어야 가능하다. 함수 자체는 스스로 어떤 특정한 수치값을 지시할 수 없고 변항-위치에 들어간 숫자와 결합하여야만 완전하게 된다. 때문에 함수 자체는 완벽한 것이 아니다.
그는 언어 분석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형식을 적용한다. 이 때 ''함수''라는 형식은 ''개념-단어''라는 말로 대치되고, ''수치값''이라는 말은 ''진리값''이라는 말로 바뀌게 된다. 위에서 변항-위치에 들어갔던 변항-표시에는 다양한 고유 명사가 들어갈 수 있고 이것 역시 하나의 기호이다. 앞서서 숫자 ''7'' 을 살펴본 것과 마찬가지로 ''김대중''이라는 고유 명사를 살펴 볼 수가 있다. ''김대중''은 ''김홍걸의 아버지'' 그리고 ''이희호의 남편''이라는 다른 기호로도 표시될 수 있지만, 그것이 지시하고 있는 지시체는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구분을 일반적으로 적용하여 보면 문장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 )는 철학자이다.

이러한 불완전한 문장이 개념-단어이다. 때문에 문장의 참, 거짓은 ( )의 자리에 들어가야 하는 ''변항-표시''에 의해서 그 진리값이 나타난다. 변항-표시의 자리에 많은 말들을 집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 니체, 칸트 등등의 말을 집어넣으면 문장은 참이 된다. 그러나 4, 다보탑, 기방 등의 말을 집어넣으면 문장은 거짓이 된다. 따라서 변항-표시 자리에 들어갈 고유 명사에 의해 위의 문장은 진리값이 결정된다.

칸트는 철학자이다. (참)
다보탑은 철학자이다. (거짓)

변항-위치에 들어갈 고유 명사는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다. 그러나 진리값을 결정해 줄 변항-위치가 비어 있는 상태의 개념-단어는 완전한 것이 아니다. 때문에 개념-단어는 변항-위치가 채워질 때 비로소 하나의 완전한 문장이 된다. 그렇다면 문장의 진리값을 참되게 하는 원소들의 집합이 있을 수 있다. 반대로 문장의 진리값을 거짓이 되게 하는 원소들의 집합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문장의 진리값은 변항-위치에 들어갈 원소들의 참,거짓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문장을 구성하기 위해서 위의 두 가지 집합들의 원소들만 대입하면 된다. 즉 우리에게는 문장을 만들 수 있는 두 가지의 조건이 주어진 것이다. 때문에 이제 문장은 심리적인 면을 벗어나 논리적인 구성에 의해 참이 되게 하는 진리 조건들을 충족시키기만 하면 참이 되는 것이다. 계속해서 살펴보자.
프레게는 변항-위치가 위의 문장에서처럼 하나만 있을 때를 일항 술어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변항-위치가 두 개가 될 때는 이항 술어라고 했으며, 이러한 방식으로 더 많이 진행될 수 있다고 하였다. 다음을 보자.

( )가 ( )를 죽였다.

이 두 개의 변항-위치에는 다음과 같이 많은 변항-표시(고유 명사)들이 들어 갈 수 있다.

안두희가 김구를 죽였다. (참)
김구가 안두희를 죽였다. (거짓)
이승만이 안두희를 죽였다. (거짓)
김구가 이승만을 죽였다. (거짓)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이 일항 술어서나 이항 혹은 그 이상의 다항 술어에서 적절하게 변항-표시 위치에 다양한 원소를 대입하게 되면 진리값이 나오게 된다. 프레게의 이러한 방법은 문장을 파악하는데 더 이상의 심리주의 (낱말의 의미는 그 낱말을 사용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과정과 관련해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다 더 강한 심리주의자의 주장은 낱말을 사용할 때 우리가 지시하고자 하는 대상은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낱말의 의미는 우리 마음 속에 일어나는 과정이다. 영국 경험론자들이 이러한 심리주의에 속한다.)를 허용하지 않는다. 주지하지만 이제 문장의 참은 그가 명명한 불완전한 개념-단어인 ''( )가 ( )를 죽였다.'' ''( )는 철학자이다.'' 의 형식에서 그것이 참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참된 변항-표시를 하는 원소들만 찾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문장의 진리값은 그것이 참 혹은 거짓이 되게하는 변항-표시의 구성에 의해 판명된다. 따라서 문장을 구성하는 진리 조건들(변항-표시 자리에 들어갈 원소)이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문장의 진리에 대해 맞다, 틀리다 하는 의견의 불일치는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방식으로는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를 다 설명하지 못한다. 심리주의를 배격한다고 객관적인 외연성에만 치중한 결과 다음과 같은 문장은 참일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는 상황을 야기시킨다.

남자가 여자를 죽였다.

이러한 문장의 진리값은 참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남자와 여자라는 변항-표시에 들어간 고유 명사가 대명사이기 때문에 위의 문장은 의미가 없다고 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왕산에 사는 박씨 부부가 서로 싸우는 도중에 남편(박개똥)이 아내(장말자)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치자. 그리고 그 사실은 왕산에 사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고 치면 위의 문장은 왕산이라는 공동체 내에서 참인 문장이 된다. 그러나 위의 문장은 모든 가능한 세계에서 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문동에서는 위의 문장이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러나 왕산이라는 공동체 내에서 위 문장은 참이다. 만일 이문동에서도 위의 문장이 참이 되려면 필연적으로 말하는 사람의 개입이 필요하게 된다. 만일 이문동에 사는 사람에게 화자가 상황을 말해주지 않으면 이문동에 사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심리주의적인 방향으로 문장의 내용을 억측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비트겐슈타인을 이야기 할 때 좀 더 자세하게 말하기로 하겠다.

위에 본 바와 같이 프레게는 변항-위치에 들어갈 고유 명사와 완전하지 않은 개념-단어의 구분을 명확히 하였다. 그렇다면 완전하게 만들어진 문장을 구성하는 고유 명사와 개념-단어에 대해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음 문장을 보자.

1. 칸트(a)는 칸트(a)이다.
2. 칸트(a)는 순수 이성비판의 저자(b)이다.

위의 두 문장은 둘 다 동일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1번 문장의 경우에는 개념-단어와 변항-위치에 있는 고유 명사가 동일하므로 아무런 뜻도 없다. 2번 문장의 경우에는 개념-단어와 변항-위치에 있는 말이 서로 다르다. 1번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인식적 도움이 필요하지 않지만 2번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의 인식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a)가 지시하고 있는 대상과 (b)가 지시하고 있는 대상은 동일하다. 즉 (a)와 (b)는 같은 지시체와 지시-관계를 맺고 있다. 좀 더 개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지시체와 지시-관계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겠다. 칸트(a)라는 고유 명사는 기호에 불과하다. 즉 대상을 나타내기 위하여 작명된 하나의 기호 체계이다. 그러면 칸트(a)라는 기호는 그것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과 어떤 관계에 있다. 이것을 지시-관계라고 하자. 기호는 대상을 지시하며 지시-관계 속에 놓여 있다. 이렇게 지시된 대상이 지시체이다. 순수이성비판의 저자(b)도 마찬가지로 기호이며 지시체에 대해 지시-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나 칸트(a)와 순수이성비판의 저자(b)는 분명히 다른 뜻을 각자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들은 같은 지시체에 관계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것이다. 때문에 참된 문장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기호(a,와 b)들이 지시하고 있는 대상(지시체)이 같아야만 한다. 서로 어느 하나가 다른 지시체와 관계하고 있다면 그 문장은 동일성의 문장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형식이지 사실적인 관계가 아니다. 즉 프레게는 위와 같은 형식의 문장들은 기호들이 지시하고 있는 지시체의 사실적인 존재 유무와는 별개의 문제 생각했다. 따라서 프레게에게는 다음의 문장도 지시체가 동일하면 참된 문장이라고 간주한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한 사람은 햄릿이다. (참)

이쯤에서 러셀을 살펴보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그는 철저한 실재론적 입장에 서서 위의 문장과 같이 실재하지 않은 대상들에 대해서는 그 문장이 참도 거짓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일 위의 문장을 부정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한 사람은 햄릿이 아니다. (거짓)

그러나 실상 햄릿은 존재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위의 문제는 참도 거짓도 아니다. 즉 배중률을 무력화시킨다. 때문에 초기의 러셀의 주된 관심은 인식의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 진다. 러셀은 인식을 직접적인 대면과 기술구에 의해서 파악되는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위의 문장을 다시 구성해서 살펴보자.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한 사람이 햄릿이라는 것을 안다.

햄릿이 실재한다고 가정하고 논의를 한다면, 햄릿과 직접적으로 대면하여 그가 직접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면 그것은 참이며 직접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한 사람이 햄릿이라는 것을 신문에서 혹은 TV에서 들어서 아는 경우에는 기술구에 의한 인식이 된다. 전자의 경우에는 문제가 될 것이 없으나 후자의 경우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한 사람이 햄릿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그 질문의 응답자는 나름대로 인식의 정당성을 기술하려 할 것이다. (이러한 지식을 현대 인식론에서는 표상적 지식이라고 부른다. 현대 인식론에서는 표상적 지식을 주로 다루며 그 지식을 정당하게 해주는 조건에 대해 주로 논의한다.) 이제 러셀은 주된 관심을 기술구로 가능한 인식으로 돌리게 된다.
(러셀의 관심이 이렇게 진행되게 된 주요 배경에는 기본적으로 실재론에 입각한 그의 생각이 깔려있다. 러셀은 언어적으로 표현된 대상과 그 실재에 대한 일치를 생각했다. 이러한 논리 원자론적인 생각은 초기 비트겐슈타인과도 동일한 것이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이와는 달리 러셀은 대상과 실재 사이의 일치에서 출발하여 인식론과, 의미론 등에 대해 많은 것을 언급하였다.)
기술구에 의한 인식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기술구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다. 러셀은 기술구를 두 가지로 나눈다. 그 첫 번째 유형은 ''이러저러한 어떤 것'' 이고 두 번째 유형은 ''이러저러한 바로 그것'' 이다. 전자는 애매한 기술구인 반면에 후자는 한정 기술구이다. 예컨대 우리가 한 사람에 대해서 말을 할 때 구체적인 설명 없이 그저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첫 번째의 유형이고 보다 자세히 ''한국외대 철학과에 다니는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두 번째의 경우에 해당한다. ''바로 그것''이라는 말은 그 대상이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며, 그 속성으로 인하여 대상을 한정한다. 앞 서 예로든 문장을 살펴보자.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한 사람(a)은 햄릿(b)이다.

여기서는 (a)가 (b)라는 고유 명사를 한정하는 한정 기술구이다. (b)의 속성 중에 (a)가 포함되게 된다. 러셀은 자신을 괴롭힌 실재하지 않은 대상에 대한 문장의 진위 여부를 위해 모든 가능한 문장들을 한정 기술구로 풀어내려는 시도를 한다. 이제 러셀이 예로든 문장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1.황금산은 아름답다.

이 경우에 주어인 ''황금산''에 대응하는 실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황금산은 상상 속의 존재일 뿐 현실에서 그 대상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황금산''이라는 기호의 지시체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러셀은 ''황금산''이라는 기호는 고유 명사가 될 수 없고 다만 한정 기술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황금산''이라는 기호는 풀어서 설명이 가능한 술어의 형태로 나타나야만 한정 기술구로서의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여기서 주지해야 할 것은 러셀의 이러한 방법이 문장에서 전통적인 주어-술어 의존적 상황을 해체 시키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논리학이 하나의 문장을 주어와 술어로 쪼개는데 기초하고 있다면, 러셀의 이러한 방법적 시도는 단적으로 말해 그러한 주어-술어 구분을 없애고, 여태까지 주어라고 여겨졌던 것을 모두 술어로 이해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시각에서 ''황금산''을 주어, ''아름답다''를 술어로 본 것과 달리 ''황금산''도 술어이고 ''아름답다''도 술어가 되도록 다음과 같이 분석하는 것이다.

2.어떤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황금산이다. 그것은 아름답다.

이 경우 주어와 술어로 분석한다고 할 때, 주어의 위치에는 ''어떤 것''과 ''그것''이라는 대명사만이 있을 뿐이고, ''존재한다'', ''황금산이다'', ''아름답다''는 모두 술어의 위치에 있게 된다. 이제 문장을 ''그리고'' 라는 접속사에 의해서 연결하고 ''어떤 것'' 또는 ''그것''이라는 대명사를 ''x'' 로 대치하면 첫 번째 문장의 논리적 분석이 된다는 것이다.

3. x가 존재하는데, x는 황금산이고, x는 아름답다. (이렇게 분석된 문장 형식을 러셀은 명제-함수라고 불렀다. 이러한 명칭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처음 프레게가 언어 분석을 하기 위해 수학적인 모델을 도입한 것과 같은 형식이다.)

결국 여기서 철학자들이 실체를 나타낸다고 생각해왔던 주어의 내용은 간데 없고, 주어라고 여겼던 것들은 한정적으로 대상을 나타내 주고 있는 술어의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 러셀은 초기 자신을 괴롭혔던 대상의 실재 문제에 대해서 즉, ''황금산은 아름답다'' 와 같은 문장에서 실재하는 실체로서의 황금산의 존재를 찾아내기 위해 골머리를 앓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는 ''선은 덕이다''라든지 ''신은 전지전능하다''와 같은 형이상학적 문장들에 대해서도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눈에 보이는 문장의 문법적 구조(주어-술어 형)에 사로잡혀 눈에 보이지 않는 문장의 논리적 구조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며, 이제 새로운 논리학에 기초한 문장분석을 통하여 논리적 구조를 제대로 알게 되었으므로 많은 철학의 문제들이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고유 명사는 모두 한정 기술구로 서술이 가능하다는 결과를 가져온다.따라서 고유 명사가 지칭하는 지시체로서 대상의 본질은 결국 모두 한정 기술구에 의해서 우유적으로 변할 수 있게된다. 때문에 대상의 본질이라는 것은 사라지게 되며 오직 x의 자리에 들어갈 ''그것, 이것'' 등의 대명사만이 변하지 않는 고유 명사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게 되면 세계에 실재하는 대상의 본질은 없어지는 결과가 나온다. 러셀 식의 분석적인 방법에 의한다면 세계에 있는 대상은 좀 더 잘 살펴볼 수 있을 뿐이지 본질은 알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와는 대조적인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크립키이다. 러셀보다는 한참 후대의 사람이지만 이쯤에서 살펴보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크립키에 의하면 고유 명사는 한 번 그렇게 명칭이 주어지면 대상 자신과 필연적으로 동일하게 맺어지는 명칭이다. 위에서 본 것과 같이 러셀 식의 문장 분석은 고유 명사를 기술구로 환원시켜 대상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반면 크립키는 고유 명사를 그 실체성에 있어서 불변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렇게 간주하고 문장을 분석하면 결국 문장의 분석은 대상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 된다. 고유 명사의 불변성을 다음의 예를 보자.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저자이며 실천이성비판의 저자이다.

여기서 순수이성비판의 저자와 실천이성비판의 저자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크립키가 주목했었던 것은 여기서 우연적인 것은 한 사람이 이러한 두 가지 것을 둘 다 갖는다는 것이며 이러한 우연성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 사람과 그 자신의 동일성의 필연성 (칸트가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쓰지 않았다 하더라고 그는 그 자신과 동일했을 것이다.)을 파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즉, 칸트가 그 자신을 포함하는 ''반사실적 상황'' 혹은 ''가능세계''에서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쓰지 않았더라도 칸트는 칸트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고유 명사의 필연성과 불변성을 전제하고 문장을 분석하면 고유 명사를 주어로 갖는 문장은 궁극적으로 그 고유 명사가 지칭하는 대상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고정된 이름은 항상 그것이 실제세계에서 지시하는 것과 같은 것을 ''다른 가능세계''에서도 항상 지시한다는 주장으로 일반화된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칸트는 임마뉴엘이다. (여기서는 칸트라는 성과 임마뉴엘이라는 이름의 구분없이 그것들을 같은 대상에 대한 다른 지칭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두 개의 고유한 이름을 포함하며 참된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이러한 이름들이 고정지시어라면, 각각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존재자 (각각이 현실 세계에서 지시하는 그 존재자) 를 지시할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이 두 이름들은 동일한 사람을 지시한다. 따라서 그들 각각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바로 그 사람을 지시하고 그리하여 칸트가 임마뉴엘인 것은 필연적인 참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선험적으로 알 수 있다기 보다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는 것 때문에 필연적일 수 없다고 생각될 수 있다. 때문에 이러한 문장은 크립키에게 후험적이며 필연적인 진리를 나타낸다.
위의 문장이 그저 우연적이고 우유적인 것이라는 생각은 앞서 살핀 러셀의 고유 명사에 대한 이론에서도 드러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러셀에 의하면 어떤 이름의 지시체는 이름과 관련된 한정기술구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크립키는 고유 명사에 대한 이러한 이론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크립키의 입장에 따르면 이름들은 의미없이 단지 그들의 지시체를 지칭하도록 제공되는 ''꼬리표''이다. 크립키는 이름이 처음 도입될 때 그 지시체와 명시적으로 관련되고, 그 사용의 인과적 사슬에 따라 이름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까지 추적되기 때문에 이후의 이름의 사용은 그 대상을 지시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정해진 이후에 고유 명사가 대상을 지시하는 것은 러셀처럼 그 이름과 관련된 구체적인 기술을 만족시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고유 명사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에 대한 본질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다시 러셀에게로 돌아가서 의미의 역설을 살펴보자. 러셀을 괴롭힌 수학적 역설이 몇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진리론적 언어문제를 발생하게 한 거짓말쟁이의 역설만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이 역설은 성경에 나온 유일한 거짓말이라는 사도 바울의 이야기에서 기원한다.
사도 바울이 전도를 하러 크레타 섬으로 갔다. 그런데 크레섬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 했다.그러던 중 한 사람이 바울에게 ''모든 크레타인들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라고 했다. 바울은 그 사람이 한 말을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조금 더 쉽게 살펴보자.

이 문장은 거짓이다.

이 문장에 어떠한 진리값을 부여하건 그것은 모순이 된다. 위 문장에 참이라는 진리값을 주게 되면 문장 내용이 거짓이므로 모순이 된다. 반대로 거짓이라는 진리값을 주면 문장이 참이 되어야 하므로 그것 역시 모순이 되어버린다. 이것에 대해 러셀은 위의 문장은 자기 지칭적(self-referring) 문장이므로 우리는 이러한 문장에 대해 문법적으로 그른 문장이라고 간주해야 한다고 한다고 해결책을 말했으나 불행히도 이런 방법으로는 다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된다.

1.문장 2는 참이다.
2.문장 1은 거짓이다.

이 문장에서 두 문장은 모두 자기 지칭적이지 않다. 그러나 1번 문장을 참이라고 가정하건 거짓이라고 가정하건 그것은 다시 역설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러셀의 역설은 진리론적 언어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에 대한 해결은 몇 가지가 있으나 타르스키의 해법을 살펴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논리 실증주의자인 카르납과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카르납은 프레게와 러셀의 철학의 연장선상에 서서 그들이 문장을 분석할 때 사용했던 기호(프레게나 러셀 모두 대상을 지칭하는 이름을 단순히 기호로 파악하여 논리적인 접근을 했다.)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프레게와 러셀의 형식 논리학에서의 연구는 표상이나 판단과 같은 심리적, 정신적 구조가 아니라 언어구조 특히 명제나 문장들을 탐구대상으로 형성할 때만 소득있고 정확한 결과를 얻게 된다고 하는 믿음을 주었다. 따라서 논리적 진리와 논리적 추론같은 중요한 논리적 개념들은 오직 언어체계의 명제들과 관련됨으로써 정확하게 된다. 이런 영향은 카르납에게 있어 보다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에게 있어서 문장은 화용론적인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즉, 그는 언어에 대한 형식적 연구를 주된 관심으로 삼았고 어떠한 의미도 결여한 순수한 기호 차원(통사론적 입장)에서 문장을 분석하게 된다. 따라서 그의 언어 철학은 순수하게 기호론이 되고 있고 그는 형식적인 어법과 실질적인 어법으로 문장의 표현 방법을 구분한다. 그에게 있어서 전통적인 인식론의 실질적인 어법에서 다루고 있는 사태, 감각자료, 인식주체,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 등의 표현은 무의미한 사이비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이기에 배제되어야 한다. 위에서 보았듯이 다음과 같은 문장은 프레게와 러셀에게는 별 다른 문제가 없었다.

x는 사물이다. 혹은 ( )는 사물이다.

러셀이나 프레게는 이것을 명제함수(개념-단어)로 보고 x에 고유 명사를 대입해서 완전한 문장으로 만든 다음 그것의 진리값을 확인했다. 그러나 카르납의 경우 x에게 중요한 것은 카테고리에 맞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음의 문장을 보자.

1. 장미는 사물이다.
2. ''장미''는 사물어이다.
3. 장미는 빨갛다.

카르납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x 와 ''x'' 는 분명히 다르며, 여기서 ''x'' 는 x의 이름(기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용의 구분에서는 분석/종합명제의 구분이 필수적이며, 추상적 존재를 인정할 수 없게 된다. 바꾸어 말해, 눈에 보이는 구체적 현상은 종합명제인 3번 문장의 경우로서 과학이 검증과정을 통해서 참, 거짓을 따질 수 있지만, 1번 문장의 경우와 같이 사이비 대상문장에서는 형식은 3번 문장과 같지만 내용은 2번 문장과 유사하다. 결국 1번 문장은 2번 문장으로 번역이 가능하다. 2번 문장은 언어에 있어서 형식만을 다룬다. 1번 문장이 2번 문장으로 번역되어야 하는 이유는 1번 문장이 언어외적인 요소를 지칭하려고 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1번 문장은 논리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표현이며, 보다 정확한 의미를 나타내기 위하여 2번 문장과 같이 정정되어야 한다. 요컨대 진정한 대상문장은 3번의 경우이며 이것은 과학의 연구대상이고, 사이비 대상문장인 1번의 경우는 철학에서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문장이며 철학에서의 바람직한 언어사용을 위하여 2번과 같이 통사적 문장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1번 문장을 2번의 형식으로 번역한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10은 사물이 아니라 수다.

위 문장은 사이비 대상문장이다. 따라서

''10''이라는 기호는 사물어가 아니라 숫자이다.

라는 통사적 문장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 예에서 앞의 문장은 수적 표현보다는 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통사의 혼동을 가져오기 쉬우며, 그에 따라 진정한 수의 본질이 무엇이냐와 같은 물음을 묻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수는 실재하는가 아니가, 수는 초정신적 실재인가 등의 문제는 바로 전통적인 철학이 걸려든 함정인데, 이러한 형이상학적 문제들은 어떤 종류의 문장형식에 의해서도 정식화될 수 없는 사이비 문제들이다. 때문에 카르납에게 철학적 명료화 작업이란 대상을 표시하는 기호를 정확히 하는 문제에 대한 작업이며 다음과 같은 형이상학적 물음 역시 문장의 논리와 기호에 관한 분석적인 차원에서 끝나고 만다.

''신''은 존재한다.

따옴표 안에 들어가서 기호적으로 명료화된 ''신''은 이제 더 이상 본질적인 접근이 어려운 단순한 기호체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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