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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일본인들의 한국 기생관광[1]
by 한국녀 (대한민국/여)  2010-11-19 16:19 공감(0) 반대(1)
'그 시절 그 이야기'엔 자랑스러운 장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혀를 물어 아픔을 삭이고 수치심에 낯붉히며 몸을 떨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나라를 뺏기고 동족전쟁도 치렀지만 짧은 시간에 고도성장을 이루다보니 그 뒤안길에 진창은 오죽 많았겠는가. 눈물로 닦기 힘든 수모를 또 얼마나 견뎌야 했겠는가. 1970년대 이른바 '기생 관광'은 수치스럽지만 잊어선 안 될 현대사의 치부요, 진창으로 기록돼있다.









체면도 염치도 없이 '기생 관광'에 오른 일본인들




박정희대통령이 김재규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서거하기 하루 전인 1979년 10월25일. 서울 여의도의 한 호텔 객실에서 40대 일본인이 한국인 호스티스 L양(23)을 살해하고 자살을 기도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자살기도 전 경찰과 대치하는 동안 유서를 써 객실 창문 옆에 남겨놓았다. 빗나간 사랑과 살인을 변명하는, 치기어린 넋두리였다.







"우리는 천국에서 결혼한다. 천국엔 국경이 없다… L은 나와 반지까지 교환하며 결혼을 약속해놓고 내가 준 결혼비용을 다른 남자와 다 써버렸다. 기생의 말을 믿은 내가 바보다… 경성특별시 직원님, 수고스럽지만 우리 두 사람 시체를 무연고자 묘지에 함께 묻어주십시오…"



일본에서 선박소개업을 하는 기요타(44)는 4개월 전 단체관광을 와 요정에서 L양을 만났다. 닷새를 L양과 함께 보낸 기요타는 그 후 매달 입국해 그녀를 찾았고 9월에는 이혼증명까지 떼어와 보여주며 결혼을 요구했다. 그러나 L양은 성격이 포악한 그와 맺어질 마음이 없었다. 결혼비용으로 1백만 엔을 받았지만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 그예 변을 당한 것이다. 기생관광으로 맺어진 욕정과 돈의 변주곡이 빚은 치정살인이었다.



일본인은 호색동물
1973. 7. 10 [동아일보] 7면







70년대 초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인들의 '섹스 관광'은 한국의 밤을 마비시켰다. 그즈음 서울의 관광지는 어디나 일본인으로 득실거렸다. 일본의 일용잡급이나 막 노동자 수입으로도 한국에 오면 한껏 기분을 낼 수 있었다. 엔화 가치가 그만큼 높았다. 제 나라에서는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는 푼돈을 나부끼며 허세를 부렸다. 체면도 염치도 없었다. 아니, 그런 걸 차릴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일본 돈 위세로 최고의 향락을 누리기 위해 한국을 찾은 거니까.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향락을 누리는 곳 '한국'





일본인 관광 한국의 실상
1973. 7. 13 [동아일보] 5면


72년 일본교통공사가 발행한 관광안내서에 "한국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욕망을 충족시키는 나라"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관광회사들도 "한국에선 하루 30달러만 쓰면 최고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며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향락을 누리는 곳, 한국 유객작전을 폈다. 관광단 모집 명칭부터 아예 '기생파티 관광단 모집'이라고 한 곳이 많았다. 흥청망청 밤마다 섹스 파티를 벌인다는 노골적 표현만 안 했을 뿐 한국만 가면 바로 기생을 끼고 놀 수 있으며 매매춘도 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60년대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도쿄올림픽도 성공적으로 치른 일본은 일찌감치 자국민 해외여행을 자유화시켰다. 일본 관광단이 해외로 쏟아져 나오며 그 유별난 행태가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40-50명 대부대가 '깃발' 든 인솔자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단체로 매매춘에 나서는 모습도 보도됐다. "돈만 아는 '경제 동물'이 돈을 좀 벌자 '섹스 동물'이 되었다"는 비난이 높아졌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침공피해를 입은 나라들은 그들의 새로운 '섹스 침공'에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던 1972년. 일본은 중국과 수교하며 대만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대만은 그동안 일본인들의 은밀한 섹스 여행지 노릇을 해왔던 곳. 지리적으로 가깝고 비용면에서도 별 부담이 없던 관광지 한 곳을 잃자 일본 여행사들은 그 대안으로 바로 한국을 점찍었다. 일본인들이 선망하는 '게이샤' 즉 기생을 한국관광 핵심 포인트로 잡아 선전을 시작했다. 5만 엔 정도를 들고 2박3일 한국여행에 나서는 일본 중년남자가 속속 모였다. 72년 한국을 찾은 일본 관광객의 80%는 아내나 가족동반이 아닌 나 홀로 중년남성들이었다.



일본의 한국 기생관광 러시는 많은 이의 분노를 자아냈다. 식민지배의 한이 가시지 않은데다 한일국교정상화마저 석연치 않게 이뤄졌다고 믿는 이들이 특히 분노했다. 언론도 비판에 앞장섰다. 관광수입이 주요 외화 획득원이 된 데에는 박수를 치면서도 "아무리 관광을 보이지 않는 무역이요, 달러 획득의 지름길이라 한들 일본인에게 우리 여인의 정조를 상품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관광망국의 우'를 범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미풍한국 흐리는 외빈접대
1971. 11. 25 [동아일보] 7면










한 푼의 외화가 더 중요했던 정부는 ‘수수방관’






접객여성 등록증의 허실
1972. 10. 5 [경향신문] 5면


72년 중반 무렵부터 신문들은 일본인들의 매춘관광 실태를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관광단 뒤를 쫓으며 르포기사를 쓴 신문도 있었다. "한국관광 첫날, 낮에 고궁 몇 군데를 대충 둘러본 뒤 바로 관광요정으로 향한다. 1부에선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인들이 나와 제비뽑기로 파트너를 정한다. 2부에선 서먹함을 감추려고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운다. 밤 9시쯤 3부가 시작된다. 바로 아가씨들과 호텔로 동행하는 것이다."



일본의 한 주간지는 자국민 섹스관광 실태를 이렇게 묘사했다. "50명 단체관광객이 모두 한 명씩 아가씨를 동반하고 희희낙락하며 호텔 엘리베이터에 몰려드는 꼴은 러시아워의 전철 정거장을 연상케 한다." 이 잡지는 "관광객은 원하는 대로 몇 번이고 즐길 수 있다. 기생은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는 낯 뜨거운 코멘트까지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당시 미국의 시사 잡지 타임도 특집기사를 통해 "한국이 일본 호색한들의 도락장이 되었다"고 개탄할 지경이었다.







일본인들은 매너도 엉망이었다. 고궁 담벼락에 오줌을 누는 사람, 호텔 로비를 맨발로 다니거나 욕실 옷을 입은 채 거리로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구두를 벗어드는가 하면 모든 층 단추를 눌러 엘리베이터가 설 때마다 시시덕거리는 등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인간이 갖가지 추태를 부렸다. 어느 칼럼니스트는 일단의 일본관광객이 술이 취해 목청껏 일본 군가를 부르는 걸 듣고는 "이런 걸 방관하는 한국이란 나라는 도대체 어떻게 된 나라냐?"며 울분을 터트리기도 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한국 정부는 손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방관하며 외화수입이 느는 것만 즐기고 있었다. 경제개발계획을 세우고 집행하는 정부에겐 당장 한 푼의 외화가 더 중요했다. 경제부처는 물론 모든 장관들은 "적극적 외화획득이 곧 애국"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여기에 고무되어서 일까, 기생관광에 종사하는 어느 여성이 외신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자신이나 가족,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경제발전을 위해 많은 외화가 필요합니다."고 말해 화제가 되었다.




관광지대의 섹스 오염
1981. 8. 14 [경향신문] 3면







정부가 기생관광을 국제매춘보다 외화획득의 발판쯤으로 생각하다보니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숫자도 늘었다. 73년 여름 로이터통신은 "한국관광공사엔 안내양이 1천5백 명으로 등록돼 있지만 8천 명이 더 일본인 접대 업무에 종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보도했다. 당시 신문에는 '요정 근무, 초보 우대, 옷 선불 제공' '관광호텔 근무, 초보 환영, 월수 25만 보장' 같은 광고가 심심치 않게 실렸다. 서울 풍속도 연재소설을 쓴 한 작가는 일본인을 상대로 매춘하는 여성을 '단순 매춘부' '콜 걸' '현지처' '고급 계약자'로 구분해 화제가 되었다.










"정신 부패하고 도덕 타락하면서 달러 벌어 뭐하나"




한해 10만 미만이던 일본 관광객이 근 50만 명으로 급증한 73년 여성계에서 기생관광 반대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한국교회 여성연합회 등이 일본의 기독부인회 등과 연대해 조직적으로 반대운동을 벌였다. 12월19일 이화여대생들이 김포공항 입국장에서 '섹스 애니멀 고 홈'이란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이날 나눠준 유인물에서 "정신은 부패하고 도덕은 타락하면서 달러는 벌어 뭐하느냐" "내 조국을 일본남성의 유곽지대로 만들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여성운동 차원서 기생관광 정화를"
1983. 8. 3 [경향신문] 7면


12월 22일에는 서울대 기독학생회원들이 일본대사관에 들어가 매춘 관광 반대 구호를 외쳤다. 25일에는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22개 일본 여성단체가 연합한 데모가 벌어졌다. 부인들은 '한국에 대한 섹스 침략 반대' '기생관광을 위한 한국여행은 집어치워라'는 구호를 외치며 일본 남성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외신들이 이날 피켓 데모를 긴급기사로 타전한 탓에 세계는 다시 한 번 추한 일본인들에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정도가 다였다. 여성계의 반대운동이 아무리 거세도 한번 시작한 일본의 한국 섹스관광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물론 외화 획득을 통한 경제발전 구호만을 꿰고 있던 정부도 일본인의 섹스 관광을 막을 의도가 전혀 없었다.



74년 8월15일.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대통령부인 육영수여사가 재일본 조총련계 문세광의 총탄에 쓰러졌다. 그리고 10여일 후 30대 일본인 주부가 아파트에서 피살된 사건이 일어났다. 처음 경찰은 육 여사 저격에 분노한 애국단체 회원이 불특정 일본인을 보복 살해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수사를 벌였다. 그러나 피살자 남편인 일본 상사원의 한국인 현지처가 범인으로 밝혀지면서 다시 한국에서 무절제하게 놀아나고 있는 일본인 행태가 도마 위에 올랐다.







당시 한국에 상주하는 일본인 1천 명 중 독신자가 7백 명이고 그 중 5백 명이 현지처와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경찰은 추산했다. 80년대 초에는 한국 상주 일본인은 약 3천 명이었고 그 중 가족을 동반한 경우는 2백40명에 불과했다. 79년 뉴욕타임스는 일본의 섹스관광이 동남아에서 주로 서울 타이페이 방콕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도하며 50만 명의 일본인이 서울을 찾는데 그 중 여성은 3만에 불과하다고 보도했다.



리영희는 70년대 중반에 낸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일본인 섹스관광에 대해 이렇게 개탄했다. "정부나 국가가 그 여성국민에게 통행금지 면책특권을 주면서까지 외국인 사나이들을 끌어들이는 정책은, 딸을 바치고 그 대가로 부자가 되는 아비와 얼마나 도덕적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 돈으로 국민이 얼마나 부해지며 국가가 얼마나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지…"




기생관광 다시활개 요정마다 100여명씩
1983. 3. 25 [동아일보]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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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2010-11-19 23:2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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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자 우울하네. 이런 글...어두운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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