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버트 金 후원회장 맡은 결혼정보 사업가 이웅진 결혼정보회사 선우 사장처녀총각의 연분을 판다고나 할까. 서로 만나도록 다리를 놓는 아이디어도 번뜩인다. '헌혈 미팅' '영호남 미팅' '소띠 미팅' 등등. 언젠가 칠월칠석에는 '견우직녀 미팅'을 주선하기도 했다. 결혼 맞선을 본격적 이벤트로 이끌어낸 선두주자인 이웅진(李雄鎭.38) 결혼정보회사 (주)선우 대표, 중신아비 사업가로 자리를 굳힌 그가 며칠 전에는 로버트 김 후원회장 자리도 맡았다. 미국에서 복역중인 그를 돕자는 취지다. 이쯤이면 발도 무척 넓은 편이다. 중매 및 결혼 풍속도에 대한 생각과 로버트 김 후원회 활동계획에 대한 여러 얘기를 들어보았다.
"잘하면 술이 석잔, 못하면 뺨이 석대라지만 정말 어려운 게 중매입니다. 결혼이란 자체가 영원히 해답이 없는 질문이지 않겠어요". 아직은 생소한 사업이므로 나름대로 우여곡절을 겪었을 테지만, 말투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아무래도 이러쿵저러쿵 결혼을 논하기엔 젊은 나이라는 부담이 왜 없겠는가. 연세가 지긋하신 동네 어른들이 알음알음 중매를 서던 시절은 벌써 멀리 지나갔으나 결혼상담소가 어엿이 존재하는데다 '마담뚜'들도 여전히 활개치고 다니는 마당이다.
자신의 결혼정보사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사람의 행복을 자본화했다고 볼 수 있다"며 솔직히 인정한다. 따라서 인류 역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 사업이라는 얘기다. 아닌게 아니라 이 '중매시장'은 국내에서 불과 10여년만에 1천억원 규모로 급성장했으며 업체도 300여개로 늘어났다. 남이 알까 부끄러워 당사자 사이에만 슬며시 이뤄졌던 중매가 새로운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웬만한 거리마다 '결혼하세요'라는 선전 현수막이 요란하게 걸려 있는 요즘이다. 젊은 세대의 인식구조가 그만큼 달라졌다는 뚜렷한 증거다.
이런 변화에 맞춰 다양한 이벤트로 사회적인 관심을 불러모을 수 있었던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컴퓨터를 통한 꼼꼼한 계산이 뒷받침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무려 100여 항목에 이르는 개인 신상을 입력시켜 최적 조건의 파트너를 주선하고 있다. "외국에도 선례가 없는 벤처기업"이라는 것이 그의 은근한 자랑이다. 부산에 이어 대구·대전·광주에 지사를 세웠으며 올해 안에 미국 뉴욕에도 현지법인을 설립할 작정이다. “지난달 뉴욕에서 교포 총각들을 대상으로 사흘간 맞선 행사를 실시했는데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고 밝혔다.
아쉬움도 적지는 않다. 평생을 함께 살아가야 할 배필을 고르는 모임이 자칫 가벼운 오락행사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참가자들이 이번 버스가 아니라도 다음 차가 또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80만원 안팎의 연회비로 파트너를 줄줄이 소개받는 상황에서 누가 그런 생각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그의 회사만 해도 등록된 남녀 회원이 줄잡아 1만여명에 이른다.
서울 출생. 중학교를 마치고는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거쳤다. 이 분야 사업에 눈뜬 것은 스물여섯살이던 1991년. 지하철을 옮겨다니며 “궁합이 맞 는 배필을 책임지겠다"고 외치고 다녔으니, '봉이 김선달' 취급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사실은 남녀간의 결혼이 뭔지도 모를 새파란 때였다. 하지만 어렵사리 한두쌍씩 성사시키면서 지금껏 13년 동안 2,700여 쌍을 잊는데 성공했다. 미처 파악되지 않은 경우까지 감안한다면 대략 4,000쌍에 이를 것이라는 짐작이다. 올해도 600쌍의 목표를 무난히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때 직장인들을 상대로 독서회를 꾸려가다가 거덜난 경험은 큰 밑천이 됐다. 더욱이 빚만 떠앉고 책 외판원에 술집 아르바이트도 마다지 않았다. 진작에 세상의 쓴맛, 단맛을 두루 맛본 셈이다. 그 뒤로도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미혼 여성을 모아 윤락을 알선하는 얄팍한 이벤트 회사들 때문에 덩달아 의심받는 것은 약과였다. 94년에는 또 다시 부도가 났다.
아등바등 쫓아다닌 끝에 이자까지 얹어 빚더미를 깨끗이 청산했으나 그때의 채무장부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걱정은 남녀 성비 불균형으로 인한 '결혼 대란' 가능성으로까지 이어진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여자 짝꿍이 모자라는 현상이 드디어 신부감 부족 사태로 번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앞으로 결혼에서도 빈부차별과 배우자 간의 나이 격차가 벌어지는 현상이 더욱 뚜렷이 나타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혼전동거 추세에 대해서도 걱정은 마찬가지. “이혼을 피하는 방안으로 혼전동거가 제시되고 있으나 오히려 이혼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결혼의 숭고한 의미를 깨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부 돌출적인 젊은이들의 생각과 처신이 마치 전체를 대표하듯이 호들갑스럽게 비쳐지는 데 대해서도 못마땅한 모양이다.
'화제를 로버트 김 (한국명 김채곤·63) 후원회 쪽으로 돌렸다. 지난 96년 미국 국가기밀을 한국 정부에 흘린 혐의로 펜실베이니아 알렌우드 연방교 도소에서 7년째 복역중인 로버트 김. 무엇보다 어떤 계기로 후원회장을 맡았는지 궁금했다. 이번에 모임이 새로이 결성되면서 로버트 김이 본인에게 후원회장을 맡았으면 하는 의사를 전달해왔다는 것이다. 마주대면 한 적은 없지만, 적어도 두 사람 사이에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친밀감과 신뢰감이 형성되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맡았는지 궁금했다. 이번에 모임이 새로이 결성되면서 로버트 김이 본인에게 후원회장을 맡았으면 하는 의사를 전달해왔다는 것이다. 마주대면 한 적은 없지만, 적어도 두 사람 사이에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친밀감과 신뢰감이 형성되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는 로버트 김의 구명운동에 적극 관여하지 못하는 우리 정부의 무관심한 태도에 대해 은근히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오죽하면 그가 '한국 정부에 도움을 구걸할 만큼 비굴해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겠는가"라고 환기 시켰다.
로버트 김은 앞으로 1년 뒤인 내년 7월27일 출소할 예정. 당초 9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모범수로 인정받아 형기가 감형됐다. 한편 당시 한국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며 그로부터 문제의 기밀자료를 건네받은 당사자인 백동일 예비역 대령(55)이 후원회의 이사를 맡았다. 사건이 표면화되면서 곧 바로 소환된 그는 2001년 전역했다.
문제는 그가 후원회 활동을 하나의 이벤트로 여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 이벤트를 너무 좋아하기에 그런 미심쩍은 눈길을 피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부친이 4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했을 때도 신문에 큼지막한 광고를 내고 교통안전의식을 주문하는 견해를 밝힌 적도 있었다. 아무리 부친을 그리는 마음이 애틋하다 해도 오해를 살만한 처신이 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본인도 "생각이 미처 걸러지지 않았던 때문”이라면서 "그러나 두고보면 알게 될 것"이라며 후원회 활동에 대해 기대를 걸어도 좋다고 거듭 강조했다.
남을 중매하는 입장에서 정작 본인의 결혼생활은 어떠할까. 지난 94년 동갑내기 부인(최은영)과 결혼해 외동딸(8)을 두었다. “어줍잖은 사업으로 부도가 났던터라 무척 어려웠을 무렵"이라고 신혼 시절을 돌이켰다. 세간을 낼 형편이 안돼 한동안 처가살이를 해야 했으니 예물이라고 변변히 갖출 수도 없었다. 닷돈짜리 금반지 하나씩 달랑 주고받은 것이 전부. 그러면서도 어떤 때는 이들이 멀다 하고 부부싸움을 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사소한 일이었다. "그렇게 서로 다투며 털어내면서 정이 깊어진 것 같다"며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주례는 벌써 3번이나 섰다. 2번은 직원 결혼식이었고, 한번은 자신이 주선한 '효도미팅'에서 만난 70대 노인들의 결혼식에서였다. 80여명에 이르 는 직원들에 대해서도 평가는 야무지다. 심지어 직원으로 근무하던 처제와 조카가 연달아 서먹하게 그만둠으로써 집안에서 난처한 입장에 처하기도 했다.
앞으로 먼 뒷날의 얘기겠지만, 딸은 어떻게 결혼시킬 것인지 궁금했다. 넌지시 물었더니 "서로간 대화의 코드가 맞아야겠으나 기왕이면 사회적 직위나 교양교육수준이 높은 사위를 얻고 싶다"는 솔직한 답변이다. 어차피 똑같은 부모 마음일 것이다.
개인적인 목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된다는 것. 그러나 새로운 각오로 뒤늦게 성균관대 사회학과에 들어갔으나 성적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이 개인적인 고민이다. 지난해 몇과목에 대해 낙제점수를 받아 올해는 휴학중이다. 사업에 바빴던 탓이리라. "스스로에 대해 뒷모습을 책임질 일이 정말로 적지 않다”는 것이 그의 다짐이다. 아직 젊었으며, 또 할 일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