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그것도 세계일주를 하고 싶었다.오래 전의 친구를 만나거나 지난 시점의 일기를 읽을때면 나는 긴 추억의 여행에 빠져들곤 한다.
그럴 때면 진한 커피 향내처럼 파고드는 꿈 많던 한 소년이 떠오른다.
학창시절의 나는 무엇이든 계획하고 시도하고자 하는 욕구로 늘 몸이 근질거리는 아이였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방학을 이용해 뭔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궁리끝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떤 아르바이트를 할까? 또 돈을 번다면 무엇을 할까?'
온갖 상상을 다 해보았는데, 그 무엇보다 하고 싶은 것은 여행! 그것도 세계일주를 하고 싶었다.
여행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짐을 챙길 정도인 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도 하기 전에 마음부터 설레었다.
이미 나는 초등학교 때 무턱대고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그때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넉넉한 여행자금 마련이 성공적인 여행을 위한 필수요소라고 생각하고 아르바이트 거리를 궁리했다.
마치 음모를 꾸미는 모사꾼처럼 나는 혼자만의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궁리끝에 내린 결론은 볼펜판매 아르바이트!
볼펜은 학생에게 필수품이기 때문에 수지타산이 충분히 맞을 것 같았다.
그러나 볼펜을 대량으로 구입할 밑천이 나에게 있을리 없었고,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서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새벽의 청정한 공기를 마시며 나는 '신문이 오!'를 외쳤다. 꼬박 한달 동안 나는 꿀맛 같은 새벽잠을 마다하고 장사 밑천 마련을 위해 신문을 돌렸다.
한달 후 신문을 돌리고 받은 품값으로 볼펜 두 박스를 사서 주로 여학교 앞에서 팔았다. 물론 그냥 팔지는 않았다.
문방구와 별 다를 바 없는 볼펜이라면 내게 사려는 구매욕구가 생길 리 없지 않겠는가?
'자! 학생 여러분, 볼펜이 나왔습니다. 이 볼펜이 단순히 볼펜이냐,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평범한 볼펜을 판다면 불초소생이 여러분 앞에 이렇게 섰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하면 여학생들은 우르르 모여들었고, 나는 더욱 신이 나서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제가 가지고 온 이것은 꽃을 주재하는 플로라 여신이 미를 선사하는 볼펜입니다.
품에 안고 잠을 자거나 연애편지를 쓰면 당신이 아름다워지는 신비한 경험을 할 뿐만 아니라 사랑이 이루어진답니다.
믿고 일단 한번 써 보세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정말 예뻐져요?' 여학생들은 까르르 웃으며 재미 삼아 볼펜을 샀다.
드디어 여름방학을 일주일 앞두고 두 박스의 볼펜을 다 팔아 버렸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기뻤다. 이젠 대망의 여행만 남았다.
나는 꼼꼼하게 계획을 짰다. '일단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간다.
부산에 도착하면 배를 타고 일본으로, 또 배로 최종 목적지인 미국에 발을 디디는 것이다.'
영화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본 기억대로 배를 타고 여행할 낭만적인 계획을 세웠다. 배를 타고 오대양에서 부는 바닷바람을 다 맞고 돌아오리라.
전세계를 돌며 내가 몰랐던 세상을 접하고 오리라! 부푼 꿈을 안고 서울역에서 부산행 표를 끊고 시간이 남아 대합실을 서성대고 있는데 웬 사내 셋이 내게로 다가왔다.
혹시 선도반 선생님인가 싶어 놀란 나는 움찔했다. “학생!'
“예? 아, 예...'
“중학생이지? 따라와 봐.
우린 선생님인데 방학생활을 지도하려고 나왔어.'
어쩐지 말투가 야비한 듯 해서 혹시 불량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서울역 근처의 으슥한 골목길에서 갑자기 돌변한 그들은 주먹으로 윽박지르며 돈을 있는 대로 다 내놓으라고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울면서 돈을 다 주었고... 그날 서울역에서 미아삼거리의 집까지 엉엉 울면서 걸어갔다.
세계일주를 꿈꾸며 두 달 동안 고생했던 기억이 정말 꿈만 같은데 배는 커녕 기차도 타지 못한 것이다.
나는 그 뒤에도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고생이야 당연히 하는 것이지만 돈을 벌 수 있다는 즐거움과 또 다른 사회의 일면을 접하며 얻는 새로운 경험은 다른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을 것이다.
그날 세계일주의 꿈은 불발로 끝났지만 꿈의 실현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성실한 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았다.
무엇을 성취하든 못하든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며 그것을 통해 성숙한다는 것을 배웠다.
아르바이트에는 아마추어로서의 정신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몇 시간 일해서 많은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것과 새벽 공기를 마시며 뛰어다니는 신문배달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몇 푼의 돈보다는 고생의 가치와 인생의 보람을 맛보게 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아르바이트가 아닐까?
일을 하다보면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종종 찾아온다.
나는 그때마다 새벽바람을 맞으며 신문을 돌리거나 몇 시간이고 거리에서 여학생들에게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볼펜을 팔던 당찬 나를 떠올리며 힘을 얻는다.
사업가 이웅진은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현재 결혼정보회사 선우 대표로서 '이벤트미팅'이란 신개념을 도입해서
미혼남녀의 만남을 주선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책 '나는 플레이보이가 좋다'를 발간해 올바른 만남의 문화를 짚어 주고 있다.